얘네는 거의 침실에 상주한다. 그러나 원래 침실은 'CFZ (Cat Free Zone)'이 될 예정이었다.
꽤 긴 이산 기간을 거친 후 물론 얘네는 그런 생각 따위 하지 않았겠지 드디어(!) 이사한 게 불과 2주 전이다. 일시적인 패닉 상태 - 특히 베이의 패닉이 하루 이틀 정도 더 오래 지속되었다 - 를 거쳐 어느 정도 편안해진 듯하고, 이제는 살림들이 고양이들에게 적응할 차례다. 나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드롱기 전기포트를 주방 선반에서 바닥으로 밀어버리는 바람에 - 아마 베이가 그랬겠지 - 아주 조금 찌그러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 그리고 소파 방석들의 올이 부쩍 풀리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별 사고 없는 상태. 역시 얘네들도 나이가 들어서 - 지금 복수형을 쓰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베이만을 염두에 두고 있음 - 큰 사고는 안 치는구나.
이사한 직후 3-4일 정도는 꽤 걱정했었다. 테로는 24시간 크르릉~ 신경질만 내고 있고, 베이는 반쯤 미쳐서 화장실에 처박혀 있거나 침대 밑에서 안 나왔다. 일단 처음 이틀 정도는 둘 다 밥도 안 먹었다. 그러다가 일단 테로부터 동천이가 있으니까 안심되는지 급적응하기 시작하고 밥도 좀 먹고 화장실도 가고 스크래치 위에 앉아서 졸기도 하는 등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베이는 하루 이틀 정도 침대 밑에 더 머물렀고.
그런데 오히려 더 걱정했던 건 초기 패닉 기간이 아니라 중기 안정화 기간. 베이도 슬슬 적응이 되면서 우리가 없을 때는 거실에 나와있는 눈치고 밥도 먹기 시작했는데, 이런 베이에게 테로가 너무 짜증을 내는 거다. 약간 기분이 좋아진 베이가 그래도 형이라고 쭐래 쭐래 따라다니고 친한 척하면 테로는 정말 벌컥 화를 내면서 하악댔다. 목격하고 진짜 놀랐음. 새로 낳은 둘째를 첫째가 구박하는 상황을 목격한 없는 엄마의 심경이라고나 할까. 둘째 편을 들어주면 안 될 것 같은 그 기분 ㅋㅋ
'새로운 장소에서 베이를 보니까 새로운 고양이로 인식하는 게 아닐까?'
'설마 그 정도로 테로가 바보일까?'
그런데 실제로 테로는 중성화 수술 전과 후의 베이를 다른 고양이로 인식한 전력이 있다.
'테로가 치매가 왔나?'
'승균이가 낙성대에서 베이를 너무 편애해서 테로가 쌓인 게 있나?'
진짜 별 생각을 다 했다. 승균이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승균이는 낙성대에서 다같이 정말 잘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진실이다. 얘네들은 승균이랑 훨씬 잘 지내니까. 거의 닷새 정도 단순한 베이는 계속 테로에게 들이대고 처맞는 상황이 반복해서 발생했다. 승균이는 뭔가 얘네 심리에 대해서는 승균이의 진단이 항상 더 정확한 것 같다 둘이 성격이 다르니 환경이 바뀐 스트레스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거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테로가 참 못된 형이네. 만만한 동생에게 자기 스트레스를 풀다니. 뭔가 못된 누나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있네.
그러다가 사이가 좋아졌다. 어제는 서로 끌어안고 자더라. 여전히 말도 많고 애교도 많은 베이를 테로가 귀찮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요즘에는 하악대거나 때리지는 않는다. 항상 가만히 앉아있는 테로에게 베이가 다가가서 야옹야옹 거리면서 엄청 안긴다. 하긴 베이는 테로에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도 그런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있나! 우하하하. 낙성대에서는 매일 승균이에게 밀려서 나는 찬밥이었는데! 승균이가 없으니 나에게도 차례가 돌아오다니. 우하하하하.
또 하나 요즘 걱정되는 건 테로가 너무 자주 토한다는 사실. 낙성대에서도 이상한 것 - 예를 들면 노끈 - 주워먹고 토하는 일이 가끔 있긴 했는데, 이사온 뒤로는 이틀에 한 번 꼴로 토하는 것 같다. 소화를 제대로 못 시키는지 사료가 그대로 나온다. 고다에 검색해보면 밥을 급하게 먹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데, 갑자기 이사온 뒤로 급하게 안 먹던 걸 급하게 먹게 된건가. 이사오면서 밥그릇을 바꿨는데, 밥그릇이 높아서 그런가. 일단 그래서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줌 안압이 다시 높아졌나. 안압은 높아지면 정말 너무 아파서 절대로 티가 안 날수가 없다고 하던데. 일단 밥그릇 높이를 조절했으니 오늘 내일 지켜봐야겠다. 토요일에는 안압 검사하러 가야지. 예전에 굉장히 크게 아팠던 이후로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는 건 항상 공포스럽다. 나부터 긴장됨. 지난 3월쯤 테로 건강 진단하러 가서 피검사 하고 대기실에서 결과 기다리면서 내가 더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결과는 좋았지만. 아. 안압 다시 올랐으면 안되는데. 동천이는 베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함. 베이가 말이 너무 많다고 ㅋㅋ
테로와 베이를 보면 신기한 게 둘의 구도가 동천이와 나의 구도와 유사하다. 동천/테로는 겉으로는 안정되어 있고 불만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지만 내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나고 섬세하다. 나/베이는 단순하고 잘 먹고 잘 잔다. 스트레스 받으면 그 때 그 때 소리치고 운다. 그리고 뒷끝없이 풀린다. 진짜 신기하다.
어쨌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심한 편인 나에게 테로와 베이는 특별한 존재다. 그 전에는 미처 몰랐던 감정의 영역이 얘네를 만나면서 열렸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굉장히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붓는 집주인/등받이/사료기계/화장실청소기는 못 되지만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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