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환사의 탄생"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우리 내부의 폭력'에 대한 참고하려고 읽기 시작한 책. 내가 예상했던 문제 제기를 하는 책은 아니었으나 읽을만 하다. 지적인 자극도 되고.
'테러와의 전쟁' 이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의 용어들 대신에 우리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를 과연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12)
OMG... 정말 그렇다!
"미래를 그린 이야기는 대부분 일종의 '빅 브라더' 같은 존재를 등장시키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독재에 대한 20세기의 관점이다. 지금 일어나는 독재는 새로운 형태로 가장하고 있다. 21세기의 독재는 '민주주의'라 불린다." (59)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독의 인터뷰 직접 인용
쿠아론의 영화가 말하는 불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진단한 바 있다.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 末人, the Last Man,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59~61)
한나 아렌트가 옳았다. 이들은 바이런이 말한 숭고한 악마적 악의 화신이 아니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과 그들이 저지른 무시무시한 행동 사이에 막대한 간극이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 (82~83)
자신이 본 것을 망각하고자 하는 데서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제스처가 나온다.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알지만,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들을 완전히 떠맡기를 거부한다. 그래야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계속 행동할 수 있으니까. (89)
이 세상의 멍청이들을 보는 새로운 관점.
주이상스(jouissance).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 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96)
언어적 폭력이 단지 2차적인 왜곡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폭력행위의 원천. (106)
반공산주의 전향자인 작가 아서 쾨슬러는 심오한 통찰이 담긴 말을 했다. "권력이 타락을 불러온다면, 그 역도 진실이다. 박해는 희생자들을 타락시킨다. 비록 그 방식이 보다 미묘하고 비극적이긴 하겠지만." (174)
무신론이라 하면 쾌락주의의 분출을 생각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무신론의 주된 특징은 모든 인간의 삶이 쓰디쓴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우리의 운명을 지켜보고 행복한 결과를 보장해주는 전능한 권위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무신론자들은 현실 도피에서 즐거움을 얻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창조적으로 제 자리를 찾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는 가르침을 전개하려 애쓴다. 이 유물론적 전통은 매우 독특한데, 그것은 우리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전개되는 운명에 완전히 내맡겨진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자각과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의 위협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지금,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197)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 혹은 정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으며 과거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범죄를 합당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뭔가 해방적인 요소가 있다. 나는 사회에 빚을 갚고 다시 자유로워지며,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자비'의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용서받은 범죄자로서) 나는 영원히 내가 저지른 범죄에 시달림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범죄는 '무효화' 되지 않았고, 소급해서 취소되지 않았으며, 지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62)
인간을 처벌하는 제도(와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핵심적인 논변은 다른 인간을 처벌하는 것이 오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사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가 진짜로 그런 판단을 내릴 위치에 있는가? 이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이 논변을 뒤집는 것이다. 진정 오만하고 죄스런 일은 자비를 베푸는 특권을 떠맡는 것이다. 평범한 존재일 뿐인 인간이, 특별히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죄를 너그럽게 사하여줄 권리가 있는가? 오직 신만이,혹은 국가적 용어로 최고의 권세를 가진 자, 곧 왕이나 대통령만이 그 예외적 지위 덕분에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줄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죄가 있다면 처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키고 신의 권능을 참칭하는, 진정한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267-268)
궁극적으론 거대한 체계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인 국부적 행위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다양성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 참여하기 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바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296-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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