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스터를먹는시간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방현석 (창작과비평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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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해주게.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67)
 - <존재의 형식>

 "…… 나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기르면서 가르쳐준 사소한 것들이었어요. 내가 군대에 지원해서 전쟁터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말했어요. '아들아,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쩔 없다. 그러나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69)
 - <존재의 형식>
 
"……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몰라. 절망은 당신과 같은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답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야." (170)
 - <랍스터를 먹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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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조리법이 아니다. 조리법을 따라 직접 만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난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면서 그게 뭐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정성스레 요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리하느라 초주검이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요리를 하면 된다. (149)

독서는 살아가면서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독서는 모든 것이다. 독서를 하면 성취감이 느껴지고 뭔가 배운 것 같고 또 한결 성숙해진 것 같은 충만감이 찾아든다. 독서를 함으로써 난 더 영리해진다. 독서를 하면 화젯거리가 생긴다. 독서는 주의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산만한 내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아주 건전한 치료제다. 독서는 도피이자 그 반대이기도 하다. 독서는 백일몽을 꾼 후 현실과 접할 수 있는 방편이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적인 하루를 보낸 후 타인의 상상력을 접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독서는 지고한 행복이다. (179)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 The Golden Notebook
스마일리의 사람 Smiley's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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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큼의 영감을 얻으려면, 나 자신부터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지. 작년 겨울, 동천이가 주면서 독후감 쓰라고 했었는데, 이제야 다 읽었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용기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폭발하는 잉여와 마음의 공허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위해,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의 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겠구나. 

블루스웨터부유한이들과가난한이들사이에다리놓기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기업가
지은이 재클린 노보그라츠 (이른아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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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한 냉소주의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한 일의 결과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늘 객으로 머무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 같았다. (105)
진짜 어려운 건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당연시하지 않고 과연 그것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256) 
아프리카는 그 화산과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우리의 얼을 빼놓을 수 있다. 아프리카는 우리에게 홍수와 한발과 병을 안겨줄 수 있으며, 가끔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안겨줄 수도 있다. 그랬다가 다음 순간에는 흡사 놀리기라도 하듯 놀라운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그 바람에 우리는 그 모든 걸 잊지는 않을지라도 용서해줄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결국 아프리카는 더 나은 것을 찾아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 (275)

우리는 자신의 과거 기억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 때문에 지혜로워진다. (277)
― 조지 버나드 
 시장의 권력과 냉혹함과 엄정함을 극빈층 사람들을 목표로 한 수많은 프로그램들에서 내가 목격한 바 있는 연민의 감정과 결합시킬 방법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미래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창조성과 포용력을 감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았다. (297)
상처받지 않고 살기보다는 뭔가에 깊이 몰입(immersion)하는 편이 더 나아. …… 그런데 너는 어떻게 살아갈 거지? (463)
 틸리 올슨 

 
희망은 안전을 지향하면서 사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는 데서 온다. (517) 
우리가 스스로 더욱더 강화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은 우리 인류의 집단적 생존 기반인 큰 희망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577) 

나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의 한 부분이다. (578)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젊은이들의 너머에는 직업적인 성공에 따라붙는 재정적인 보상 이상의 것을 원하는 성공한 이들의 큰 풀이 존재한다. 인간의 행복에 관한 신경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은 사람들의 재산이 일정한 수준 정도에 이른 다음부터는 돈을 더 버는 만큼 행복지수도 따라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더 큰 행복감을 안겨주는 한 가지 요소는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589) 
덧. 아, 그런데 번역은 좀 아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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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적인 측면에서의 소박하고 건강한 원칙은 굉장히 매력적이나, 정치 / 사회적인 그들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너무 옳고, 지루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탐구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읽어봐야지.

조화로운삶헬렌과스코트니어링이버몬트숲속에서산스무해의기록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헬렌 니어링 (보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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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삶의지속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헬렌 니어링 (보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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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삶사랑그리고마무리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헬렌 니어링 (보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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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솔직히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지루하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흥미로웠다. 일상 생활 속에서의 건강하고 소박한 원칙에 관한 책이라서 나름 재미있게 읽었고, 실제로 그 내용의 일부를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 이 책은 효진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주고간 책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 중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책이 정말 몇 권 안 되더라는 말과 함께 - 그냥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책은 아니라서, 쉽게 쉽게 넘기면서 그냥 읽었다. 스코트 니어링과 같은 사상가는 나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너무 옳은 소리만 해대서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나를 생각하게 만든 건 이 두 사람이 평생을 통해 지속해 온 관계 자체였다.

 지적이며 풍부한 감수성과 삶의 에너지를 가졌으나, 스스로의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은 여성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정치적 사상가를 삶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감수성, 삶의 에너지를 자신의 파트너의 사상과 세계관을 실천하는 데 쏟는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게 되고, 삶의 방식은 하나로 수렴된다. 

 이 커플의 삶, 혹은 스코트 니어링의 삶이 아닌 헬렌 니어링을 주어로 하는 삶의 형태는 어떤 것이었을까. 헬렌 니어링의 삶을 요약하는 글에서는 항상 '젊은 시절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빠지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면 헬렌 니어링은 젊은 시절에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으로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신념을 실천하며 살았고, 스코트 니어링을 만난 후에는 스코트 니어링의 신념을 실천하면서 살았다. 어찌보면, 헬렌 니어링을 남편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자기화하여 삶을 꾸려나가는 내조의 여왕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 관점을 달리해보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감수성 풍부한 어느 한 지성이, 결국 제대로 된 등대를 만나 행복하게 만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헬렌 니어링이 그의 삶을 통해 거둔 일정한 성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 스코트 니어링이 거둔 성과의 부분 집합으로서 볼 것이냐, 헬렌의 독립적인 성과로 볼 것이냐 - 의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헬렌과 스코트 두 사람의 관계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조화롭게 통합되어, 매우 충만한 모습을 띤다. 
두 사람의 사상적 성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서로를 만나서 평생을 함께하면서 구축한 관계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찬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손을 잡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노부부를 보면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게 되듯이, 그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2.

여기 내가 신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이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스스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목표를 말과 삶에서 최대한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 또한 올바른 일을 추구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주변의 일상적인 삶의 사소함을 넘는 이상에 나 자신을 던지고 싶었다. 스스로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특별한 존재로서, 단순히 되풀이될 뿐인 일상을 넘어선 삶의 열정을 가질 수 있었으면 했다. 나는 멀리 진리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구도자와 동료 의식을 느꼈다. 그런에 여기 그런 길 위에 있는, 형제이자 동료로서 내가 배울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는 사람이 있었다. (20)


"사랑을 하기 위해 단지 애정어린 편지만을 쓰는 것은 그림물감 없이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과 같다. 완전한 관계는 이런 식으로는 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크고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히려 점진적이고 느린 축적이 있어야 한다." (72)
- 에드워드 카펜터, 『Drama of Life and Death』


"45년의 연구와 공부 뒤에 얻은 다소 당혹스러운 결론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하라는 것이다." (77)
- 올더스 헉슬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132)

"당신이 만족스럽지 않고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은 당신이 그다지 크게 바꿀 구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조금씩 자기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성장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줄여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입니다."
- 프랭크 타운센드, 『Earth』



3.

 스코트 & 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
 스코트 & 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의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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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수도 있고
부유함이 주는 즐거움이 넘칠 수도 있다.
위대한 명성과 권세도 누릴 수 있지만
죽음이 그 모든 것을 필경 빼앗아 가버린다.

죽음의 시간에, 쌓아온 행적 말고는
한 조각의 부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선하고 악한 행동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만들어낸다. 

 …… 라다크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우리처럼 집착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우리의 삶에 그토록 영향을 미치는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거나 어떤 값진 것을 잃어버리면 불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굉장히 불행하지는 않을 수 있다.
 ……
 라다크 사람들은 일상의 음식보다 잔치를 더 좋아하고,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아프기보다는 건강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만족과 마음의 평화는 그런 외부의 상황에 달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내면으로부터 온다. 라다크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 주위와의 관계는 내면의 평정과 만족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이 건강하고 따뜻하고 배부르더라도 그가 '무지'한 한 행복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만족감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게 뭐냐?' 이다. 

 내가 라다크에서 관찰한 악순환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아마도 개인의 불안정이 가족과 공동체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이로 인해 또 개인의 자존심이 더욱 흔들린다는 것이다. 소비주의가 이 전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정서적인 불안정 때문에 물질적인 신분상징에 대한 갈망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자기를 상당한 인물로 만들어 줄 소유물을 얻고자 하는 충동을 부추기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물건 자체의 매력보다 훨씬 더 큰 동기이다. 실제로는 불가피하게 그 반대의 효과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찬양받고 궁극적으로 사랑받기 위해서 물건들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번쩍이는 새 차를 가진 사람은 특별취급을 받아 고립되고, 그래서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삶들이 점점 더 자신들에게서 또 서로서로에게서 분리되는 순환과정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우리를 말하는 것 같다. 우린 나 자신의 허약함을 감당할 수 없어서, 쓸데없는 소비에 열올리는 것이 아닐까. 그 허영과 사치로 내 마음의 빈곤함을 가릴 수 있을까하고.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중요하다. 라다크에서 늙어감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겨진다. 흔히 한동안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라다크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은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많이 늙었네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를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더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를 겁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의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어느새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동시에 'Well-aging'의 중요성을 새삼 자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잘 늙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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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북소리
카테고리 시/에세이 > 테마에세이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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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그 동네의 길을 달리는 일은 즐겁다. 주변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는 시속 10킬로미터 전후가 이상적인 속도이다. 자동차는 너무 빨라서 작은 것을 놓치기 쉽고 걷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공기가 있고 달릴 때의 기분도 각각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길모퉁이의 모습, 발자국 소리, 보도의 폭, 쓰레기 버리는 습관 등도 모두 다르다. 정말 재미있을 정도로 다르다. 나는 동네의 그런 정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도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자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만.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대중 술집에 가는 사람이 있듯이,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여자와 자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린다.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세상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면서 꼭 조깅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깨알같이 하루종일 도시를 쏘다니는 일정에서 현실적으로 참 쉽지 않더라. 소살리토에서 묵었던 날 아침 단 한 번의 조깅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루키처럼 비교적 장기적으로 여행을 하지 않는 한, 여행지에서 매일 조깅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인 듯.

"여행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그곳 사정도 잘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이동하는 것이니까, 문제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게 싫다면 여행 같은 건 하지 말고 가만히 집에서 비디오나 빌려다 보면 된다 ― 이런 말은 이론이다. 이론이자 정론이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자기에게 사고가 일어나면,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론이나 정론 같은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먼 배후의 풍경이 되어버린다.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다. 눈 앞에는 불합리한 현실에 위협을 느끼며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는 상처받기 쉬운 자아가 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혹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타인의 신상에 일어나는 재난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본래 그런 거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정도는 대비했어야지 등등) 그것이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그 정신적인 추구력은 한여름 오후의 늙은 개처럼 힘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 …… 불상사가 실제로 적나라한 현실로서 자기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사람들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불공평하다고 여기고 때로는 분노까지 느낀다. 그런 것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비교적 순탄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나의 기존 비자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헐레 벌떡  ESTA를 신청해야 했고, 마리포사에서 요세미티로 가는 오후 버스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하루 종일 조용한 마리포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여행 마지막 날 샌프란시스코와 신시내티의 야구 경기 티켓을 못 구해서 그냥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여행 내내 나의 카드가 해외 결제가 안되었고 카스트로에서 아주 큰 기대감을 안고 메뉴 세 개를 골랐는데(!) 우리가 가진 모든 카드가 결제되지 않아서 그냥 터덜 터덜 레스토랑을 나왔어야 했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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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금 파티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나는 단연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재치 있는 말들이 쉴새없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부러움 섞인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 그러나 나는 떠나왔다. (이 줄은 지구의 반경만큼이나 길어야 한다. ―― 그리고 나 자신을 총으로 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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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니어링은 자신의 소박하고 자연적인 생활 가치를 역설하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Walden>을 빈번히 인용했다. 그래서 원문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번역본이 좋은지, 아니면 아예 원어로 읽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지 못했지만.

Walden
카테고리 문학>문학이론
지은이 Thoreau, Henry David/ McCurdy, Michael (ILT)/ Will (RandomHouse,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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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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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왜민주주의에반대했는가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서양철학자 > 니체
지은이 김진석 (개마고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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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년, 올해의 책'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강준만의 <대한민국 소통법>이 김진석의 이 책과 <기우뚱한 균형>에 대해 늘어놓은 호평에 덜컥 YES24에서 주문하긴 했지만, 정작 배송된 책을 보고는 솔직히 '괜히 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라니! 내가 니체라니! 짜라투스트라 어쩌구하면서 헛소리하던 또라이 니체를 내가 읽을 수 있긴 한걸까?!

 그러나 기대 이상이었다. 재미있고 매우 흥미롭다. 잘 읽히기까지 한다. 지식인이자 교양인, 그리고 진보적인 젊은이를 자처하면서도 그동안 나의 사고는 너무 꽉 막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면, 이미 현대인의 상식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매력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리가 논쟁하는 것은 민주주의 하의 경제와 정치(제도)를 어떻게 조율하는 것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이로운가에 대한 것이지,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가지는 정당성 혹은 부조리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니체는 플라톤식의 절대 질서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고 '강자의 도덕'을 찬양한다! 이는 나에게 굉장한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고통을 회피하고 안정을 갈구하는 현대 소비 사회,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박 속에서 타인을 곁눈질하면고 자신의 '선함'을 '악의적으로' 증명하려는 약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혐오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혼자 책을 읽다가 마구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엘리트주의가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는 이미 문화적 엘리트주의의 성격을 띤다. 오히려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하면서, 겉으로는 만인이 평등한 양 떠드는 것이 더 위선적이고 악의적이다. 만인은 모두 평등할 수도, 모두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오히려 이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우리 모두에게 차등적으로 주어진 역량과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타인을 곁눈질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한국에서의 임지현이 논의한 미시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도 인상적이었다. 이 세계와 이 문화의 일부인 폭력과 잔인함을 철학적,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은 현실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철학의 명제를 현실 세계의 맥락 안에서 풀어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철학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답이 없는' 근본주의적 문제 제기 보다 각각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주의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오히려 허무주의와 권태, 무기력의 다른 말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가진 상상력은 민주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꿰뚫어 본 철학자로서 니체를 해석하고 이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놓치고 있는 부조리를 살피는 계기로 삼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진석의 말처럼,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만인은 서로 평등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는 존재하며, 폭력과 잔인함은 무조건 몰아내야 할 절대악이 아니라는 통찰력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동천이가 말했듯, 니체는 참 괜찮은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미친 놈이 아니라.

 
2.

 니체는 평안함과 행복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는 쾌락의 소비시대를 예상하고 저주한 것이다. (70)

 '고귀하고 자유로운 자'. 무엇보다 타인을 곁눈질하면서 그 타인의 흠을 자신의 덕으로 바꿔치기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훌륭한 덕을 자존하는 사람. (74)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 찾으려고 할 수도 없고 발견될 수도 없고 아마도 또한 잃어버릴 수도 없는 어떤 것. ― 고귀한 영혼은 스스로에게 경외감을 가진다. 
 ―『선악의 너머에서』, No. 287
(75)

 그는 이 책 (『도덕의 발생학에 대하여』)의 첫번째 논문에서 '좋은(gut)' 이란 말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발생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한 계열은 '착한'과 '악한'이고, 다른 계열은 '좋은/훌륭한'과 '나쁜'인데, 전자가 기본적으로 약자의 도덕적인 판단이라면 후자는 그것과 다른, 고귀함을 강함과 연결하는 판단이다.
 '좋은'을 '착한'과 등치시키는 약자의 도덕적인 판단은 타자로부터 출발하면서, 타자가 악하다는 판단 위에서 자신에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타자에 대한 곁눈질로부터 자신의 평가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수동적이고 반동적(reaktiv)이다. 그와 달리 '좋은/훌륭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친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래서 선과 악의 구별은 약자의 도덕 판단에 속하며, 좋음과 나쁨의 구별은 강자의 '고귀한' 도덕판단에 속한다. (80-81)

 약자의 선악 판단은 타자가 약탈적이라고 판단하면서 그에게 원한을 품는 식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며 도덕적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81)
 통찰력이 놀랍다. 우리 현실 세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 컴플렉스' 에 빠져 살고 있지. 자신이 현재 '약자'로 존재하는 책임을 오로지 타인에게 전가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사람들.

 아무리 현대 사회가 형이상학적 전통이나 아우라를 벗어던진 것처럼 보여도, 형이상학적 잔재들과 주체들은 여전히 존배하며 따라서 해체 작업은 시들거나 고갈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고. "문법적 주어를 믿는 한 우리는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다." (133)

 대항-철학 및 그 차원에서 작동하는 문체는 과거보다 현저하게 대항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로서의 세계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변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과거에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미세하고 복합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전통적인 철학을 텍스트 안에서 전복하거나 교정하는 일만으로는 사람들의 행위와 행동을 예측하거나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데,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진단하고 또 그 진단에 근거하여 치유책을 마련하는 데 많이 부족하거나 무력할 듯하다. (144)
 이처럼 철학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20세기 중후반 현대 사회를 찾아온 '인문학의 위기'의 기저에 깔려있다. 인문학, 그리고 철학은 더 이상 사회적 변화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지 못한다. 그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책상물림들이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자기 만족적인 논쟁을 거듭하는 데 그치게 된 것이다.

 니체가 강조하는 귀족적 가치판단은 징징 울어대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스스로 책임을 지며 넘치는 힘에 근거해 이를 낭비할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어느 시대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기준이다. (152)

그러나 아마도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금실로 짠 너울이 삶 위에 놓여있다. 미래를 예고하면서, 저항하고, 부끄러워하며, 조롱하는가 하면, 동정하고, 유혹하면서. 그렇다, 삶은 한 여자이다.
―『즐거운 학문』4권, No. 339 (161)

 "만일 진리가 여성이라면" 으로 시작하는 아포리즘의 유희적이고 유혹적인 효과는 실제로 엄청나다. 어떤 면에서는 그 유혹적이고 전복적인 힘으로 단번에 사회적 · 정치적 의미의 페미니즘을 압도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저 페미니즘은 기껏해야 기존의 남녀 대립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164)

 여성의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논의는 지금도 여전히, 아니 변형되고 확장된 채, 진행 중이다. 서양 사상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어왔다고 비판하는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론자들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여성평등론과 페미니즘이 남성을 모방하려는 남근적 궤적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180)
 기존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적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의 존재가 오히려 기존 질서의 확장과 진화를 꾀할 수도 있지. (비록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대학 학생회에서 배운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감히 말하건대) 흥미로운 논의다.

좌익 조직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미시 파시즘을 퍼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 들뢰즈 & 가타리,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189)

 우익만 파시즘에 빠지고 이념적으로 정의와 진보를 내세우는 좌익은 미시 파시즘에 빠지지 않을까? 오히려 좌익도 자주 미시 파시즘에 빠질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89)
 하다못해 나도 그래. (비교적)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나의 사적인 가치들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제스처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 순간 순간 합리화하면서 잘 고치려고 하지도 않지. 이러한 자기 성찰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김진석이 이어서 이야기 하듯이, 인간의 문화에 내재한 폭력의 존재에 대해 근본주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정말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무책임하게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2월에 읽고 리뷰한 강준만의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인용된 손호철의 칼럼은 미시파시즘에 대한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다. 

 

주변의 극소수 사람에게나마 '인간 말종' 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공적으론 대단히 호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누리고 있다. 아니 사적 영역에서도 그 나름의 장점이 많아 이 사람과 부딪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손 교수의 선배는, '인간 말종' 이라는 평가를 낳게 할 만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손 교수는,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특정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보아햐 그것은 다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얼른 보자면, 손 교수의 선배가 대국적이고 대범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바로 이런 생각이 그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공적 영역을 지배해온 주류 정서이자 원리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작은' 문제는 늘 '큰' 문제에 압도당한 채 그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188-189, 손호철,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


 일상적 행위는 알게 모르게 벌써 무시무시한 미시적 폭력의 아수라장이 아닌가? 현대 사회 안에서 개인들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일상적인 교육과 문화 영역은 개인들을 위한 미시적 폭력의 경연장 비슷하지 않은가? 자기를 계발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문화적 폭력과 권력들의 미세한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개인들이 그 미시적 폭력에서 쉽게,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아니, 문화적 교육 이전에 벌써 삶은 미시적 폭력의 경연장일 터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은 언제든지 실존적 관계에 끼어든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미시적 폭력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실존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권력과 폭력을 모두 악으로 설정한 후에,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는 길을 추구하는 것은 공허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접근은 매우 정당하지만 동시에 자칫하면 미시 파시즘을 너무 쉽고도 추상적으로 '우리 안으로' 이식할 수 있다. (191)
 미시 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을 통해 비교적 친숙하다. '우리의 일상은 알게 모르게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다. 이제는 거대 담론적 파시즘이 아닌 개인적 일상에 깊게 배인 파시즘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 진정한 사회의 변화를 위한 개인의 미시적 실천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매우 유의미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김진석은 이어 말한다.

 파시즘적 태도를 총체적이고도 미시적인 차원까지 확장해 우리 모두 안에 뿌리 뽑을 길 없이 파시즘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적 욕망과 행위가 알게 모르게, 많건 적건 그것에 시달리거나 매달리고 있다면, 아니 그것에 동의하고 참여한다면, 그에 대한 대응이 과연 구체적이고 실제적일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미시적 폭력과 권력까지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파시즘'이라는 말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 파시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 대항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박만이 남는 것 아닐까? (192-193)

 니체는 심오하고 고귀한 문화는 언제나 여러 방식으로 잔인함을 내포한다고 했다. 비록 그것의 직접적인 표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폭력성과 잔인함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고 다만 정신화하고 내면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폭발력의 큰 몫이 여기 있다. 아무리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문화의 진행과정 속에서 사라지거나 극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 순전히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문화와 폭력은 안팎의 관계에 있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 안팎의 관계. 그러므로 폭력이나 잔인함이 문화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나쁜 것도 아니고 결함도 아닐 것이며, 그것이 어떤 행위나 목적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몰아내고 배제하려는 시도야말로 맹목적일 뿐 아니라 공허할 수 있다. (194-195)
 그래서 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제거하자는 '불가능한' 주장을 반복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가 내포하는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를 해당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바로 잡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많은 점에서 사회적 권력과 폭력의 산물인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이 거칠게 과장되는 순간, 자칫하면 모든 개인이 파시스트라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개인들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를 변명할 필요는 결코 없지만, 거꾸로 모두가 미시 파시즘에 참여하고 있다고 과장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215)

 분노와 각성의 순간 우리는 "삶은 더럽다" "삶은 엿 같은 것" 혹은 "산다는 건 이미 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각성은 일종의 시적 혹은 종교적 각성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각성의 순수함을 근거로 삶을 속속들이 더러운 것 혹은 통째로 죄와 벌로 만들어버린다면 오히려 애초의 의도와 거꾸로 갈 수 있다. 삶과 존재는 긍정되고 실천될 때 오히려 자유의 여백을 남겨놓는다. 그것을 더러움과 죄의 깊은 뿌리에 예속시킬 때 알게 모르게 근본주의적 권력이 팽창한다. (215-216)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용서한 - 용서했다고 믿은 - 아들 살해범을 교도소로 찾아가 만나고 절망한다. 그를 만난 아들 살해범이 평온한 얼굴로, 자신은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받았으니 당신의 세속적인 용서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신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자를 - 그것도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 용서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잠깐이나마 믿고 의지한 신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 문단에서 영화 <밀양>이 떠오른 건, 인간의 삶을 통째로 예술 - 종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 에 의탁할 때, 예술적 순수 혹은 진정성에 스스로의 의지를 내맡길 때, 현실의 인간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제기한다고 생각해서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근본적인 회의에 바탕한 허무밖에 없지 않을까. 결국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근본주의적인 접근이 가져오는 건 자포자기로 인한 자기 파괴일 것 같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보편적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장되는 매 순간 그것과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나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만인의 동등한 권리' 라는 이념이나 이상은 크건 작건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설정되곤 한다. …… 그런 도덕주의적 이상이 실제로 실현 불가능한 것일 경우, 그런 이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이상을 빌미로 자신들의 도덕적 혹은 관료적 혹은 사제적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니체 주장의 한 축 …… (227)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동등하다고 여겨질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는 어떤 종류의 문화적 엘리트주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 과정은 싸움을 인정하는 능력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한시적인 지배와 권위는, 모든 시민과 집단이 참여할 기회를 가진 논의의 경쟁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 해텁 (Lawrence J. Hatab) (240)

 니체는 무조건 모든 사람의 평등이 담보될 뿐 아니라 모든 폭력과 권력이 극복되는 민주주의적 상태를 믿지 않았다. 그런 이상 자체가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이상의 현대적 가면이며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이상이 발생하게 된 비밀은 무엇이었던가? 다름 아니라 그것은 타자의 강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원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적 가치는 원한의 끈질긴 산물인 셈이다. (259)

 파시즘이나 맹목적인 폭력에는 마땅히 반대해야 하지만, 무조건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근본주의도 적지 않은 점에서 권력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권력과 폭력의 존재방식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265)

 니체는 권력이나 폭력이 독립적인 실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만 뿌리 뽑거나 틀어막으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실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 권력과 폭력은 … 모든 문화 활동과 함께 경향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끼어들거나 혹은 그것에 내재하는 메커니즘 혹은 기제를 갖는다.
 그렇다. 권력이나 폭력은 문화의 짝패이다. 여기서 '폭력'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폭력적' 현상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그저 야만스런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와 정신에 깊이 내재하는 비밀스런 것이다. …… 그것은 문화로 쉽게 극복하거나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과 함께, 그것에 의하여, 때로는 심지어 그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활동이나 작동이다. (266-267)

 차이에 내재하는 차별의 개입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추상적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다양한 '차이들'이 그저 좋은 의미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다원성으로 이어진다고 여기는데, 사실 '차이의 인정'은 기존의 불평등과 차별을 은근히 정당화하는 경향이 크다. (296)
 
 

3.

 들뢰즈, 『노마디즘』

 들뢰즈 & 가타리, 『천개의 고원』

Posted by 소년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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